LIFE-TECHTREE/2.0
https://m.blog.naver.com/ward134/222896707063
한은 빅스텝ㅠ
어떻게든 버티고 또 버텨서 생존하는걸 목표로 합시다
어떻게든 버티고 또 버텨서 생존하는걸 목표로 합시다
한글의 기원
그래도 아직은 한글날 연휴니깐 이 이야기를 하기에 아주 늦지는 않았겠죠?
그래서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한글의 독자성-독창성에 대한 어떤 신념 같은 것을 갖고 계신 분들이라면 다소 불쾌해하실 수도 있겠지만, 사실 한글은 고대 이집트 문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흐흐흐,
저는 인간의 창조성이라는 것이 무한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즉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상황들의 경우의 수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한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의미죠.
한글의 형태 기원에 관한 가설 중에서는 한글이 신체의 조음기관 모양을 따라서 만든 글자라는 설명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과는 다르게 한글이(특히 자음 체계가) 파스파 문자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죠. 이른바 '파스파 문자 영향설'이 그 가설입니다.
파스파 문자는 서기 13세기, 원나라 시대 때 쿠빌라이 칸의 명을 받아 승려였던 파스파가 티벳 문자를 바탕으로 발명한 문자체계입니다. 당시 원나라는 '세계국가'를 지향하고 있었고, 전 세계의 여러 문자체계들 가운데 표준이 될 만한 문자가 필요했었죠.
국내에서는 조음기관 모방설이 주류 학설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에 반하여 해외의 관련 학계에서는 파스파 문자 영향설도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검색을 해보니깐 한국에서도 지속적으로 파스파 문자와 관련한 연구는 이뤄지고 있는 듯 하고요.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는 가설인지 해당 분야의 문외한인 저로서는 판단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한글을 고대 이집트 문자와 연결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저는 '파스파 문자 영향설'을 지지합니다. 크크크,
고대 이집트 문자는 기원전 3500년 부터 초기 형태가 등장을 하고, 기원전 3000년 무렵에 되면 완성 단계에 이른 문자체계로 확인됩니다. 그리고 이 문자체계는 기원전 1800년 무렵부터 시나이 반도 지역에서 '고 시나이 문자 Proto-Sinaitic'라는 문자체계로 변형-변용됩니다.
고 시나이 문자들은 세라비트 엘-카딤 같은 이집트의 광산 유적이 있는 곳에서 주로 발견이 되었죠. 일반적으로 이 문자는 이집트인들과 오래도록 관계를 맺었던, 혹은 이집트인들이 개발하던 광산에서 노동자로 종사하던 샘어 사용자들이 이집트 문자들 가운데 몇몇 표음문자들을 차용해서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하기 시작한 것이 그 기원이라고 이야기 됩니다.
그리고 이 고 시나이 문자는 레반트 지역으로 퍼져나가 '고 페니키아 문자 Proto-Phoenician'의 기원이 되었고, 고 페니키아 문자는 '페니키아 알파벳'의 초기형태라고 할 수 있는 문자체계죠. 이후, 다들 잘 아시는 것처럼 페니키아 알파벳은 지중해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가 서양 알파벳의 기원이 되었고요. 또한 페니키아 알파벳은 아람 문자 Aramaic의 단계에서는 동쪽으로 전래가 되어 다양한 아시아 문자체계들의 밑바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깐, 한글의 형성과 관련해서 '파스파 문자 영향설'을 전제로 삼는다면,
고대 이집트 문자(상형문자) -> 고 시나이 문자 -> 페니키아 문자(페니키아 알파벳) -> 아람 알파벳 -> 브라흐미 문자 -> 굽타 문자 -> 티베트 문자 -> 파스파 문자 -> 한글
이런 계보를 만들 수가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한글과 고대 이집트 문자를 연결지을 수 있게 되니, 저로서는 이 가설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흐흐흐, 더불어서, 이 계보는 조선 전기의 문화가 갖고 있는 국제성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게 하죠.
만약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한글로 이어지는 이 계보가 맞다고 한다면 저는 이 계보의 시작과 끝에 위치한 두 문자체계에 대한 어느 정도의 문해력을 갖고 있는 셈이니 왠지 뿌듯한 기분도 느껴집니다. 흐흐,
이처럼 모든 것은 고대 이집트로 통하죠. 고대 이집트 문자 만세! 한글 만세!
#Min-SooKwack
그래도 아직은 한글날 연휴니깐 이 이야기를 하기에 아주 늦지는 않았겠죠?
그래서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한글의 독자성-독창성에 대한 어떤 신념 같은 것을 갖고 계신 분들이라면 다소 불쾌해하실 수도 있겠지만, 사실 한글은 고대 이집트 문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흐흐흐,
저는 인간의 창조성이라는 것이 무한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즉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상황들의 경우의 수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한적이라고 생각한다는 의미죠.
한글의 형태 기원에 관한 가설 중에서는 한글이 신체의 조음기관 모양을 따라서 만든 글자라는 설명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과는 다르게 한글이(특히 자음 체계가) 파스파 문자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죠. 이른바 '파스파 문자 영향설'이 그 가설입니다.
파스파 문자는 서기 13세기, 원나라 시대 때 쿠빌라이 칸의 명을 받아 승려였던 파스파가 티벳 문자를 바탕으로 발명한 문자체계입니다. 당시 원나라는 '세계국가'를 지향하고 있었고, 전 세계의 여러 문자체계들 가운데 표준이 될 만한 문자가 필요했었죠.
국내에서는 조음기관 모방설이 주류 학설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에 반하여 해외의 관련 학계에서는 파스파 문자 영향설도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검색을 해보니깐 한국에서도 지속적으로 파스파 문자와 관련한 연구는 이뤄지고 있는 듯 하고요.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는 가설인지 해당 분야의 문외한인 저로서는 판단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한글을 고대 이집트 문자와 연결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저는 '파스파 문자 영향설'을 지지합니다. 크크크,
고대 이집트 문자는 기원전 3500년 부터 초기 형태가 등장을 하고, 기원전 3000년 무렵에 되면 완성 단계에 이른 문자체계로 확인됩니다. 그리고 이 문자체계는 기원전 1800년 무렵부터 시나이 반도 지역에서 '고 시나이 문자 Proto-Sinaitic'라는 문자체계로 변형-변용됩니다.
고 시나이 문자들은 세라비트 엘-카딤 같은 이집트의 광산 유적이 있는 곳에서 주로 발견이 되었죠. 일반적으로 이 문자는 이집트인들과 오래도록 관계를 맺었던, 혹은 이집트인들이 개발하던 광산에서 노동자로 종사하던 샘어 사용자들이 이집트 문자들 가운데 몇몇 표음문자들을 차용해서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하기 시작한 것이 그 기원이라고 이야기 됩니다.
그리고 이 고 시나이 문자는 레반트 지역으로 퍼져나가 '고 페니키아 문자 Proto-Phoenician'의 기원이 되었고, 고 페니키아 문자는 '페니키아 알파벳'의 초기형태라고 할 수 있는 문자체계죠. 이후, 다들 잘 아시는 것처럼 페니키아 알파벳은 지중해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가 서양 알파벳의 기원이 되었고요. 또한 페니키아 알파벳은 아람 문자 Aramaic의 단계에서는 동쪽으로 전래가 되어 다양한 아시아 문자체계들의 밑바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깐, 한글의 형성과 관련해서 '파스파 문자 영향설'을 전제로 삼는다면,
고대 이집트 문자(상형문자) -> 고 시나이 문자 -> 페니키아 문자(페니키아 알파벳) -> 아람 알파벳 -> 브라흐미 문자 -> 굽타 문자 -> 티베트 문자 -> 파스파 문자 -> 한글
이런 계보를 만들 수가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한글과 고대 이집트 문자를 연결지을 수 있게 되니, 저로서는 이 가설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흐흐흐, 더불어서, 이 계보는 조선 전기의 문화가 갖고 있는 국제성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게 하죠.
만약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한글로 이어지는 이 계보가 맞다고 한다면 저는 이 계보의 시작과 끝에 위치한 두 문자체계에 대한 어느 정도의 문해력을 갖고 있는 셈이니 왠지 뿌듯한 기분도 느껴집니다. 흐흐,
이처럼 모든 것은 고대 이집트로 통하죠. 고대 이집트 문자 만세! 한글 만세!
#Min-SooKwack
👎9👍2🥴1
한글의 우수함과 위대함에 대해 여러글들은 읽어봤지만.. 이런 글은 또 처음이네요.
그래도 의견의 다양성을 알고 있는건 중요하니 참고해보겠습니다.
그래도 의견의 다양성을 알고 있는건 중요하니 참고해보겠습니다.
LIFE-TECHTREE/2.0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말이 있다. 주로 가족 등 아주 가까운 지인이나 주양육자로부터 정서적 학대에 가까운 가스라이팅을 오랫동안 당하거나 그 가족의 무기력한 태도를 고스란히 체화한 경우를 의미하는데, 아무래도 특정인의 삶 전체에서 이런 모습이 보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학습된 무기력은 그 사람이 항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특정 조건에서 주로 발현된다.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학습된 무기력이 발현되는 시점 또는 상황을 가지고 있을…
아까 개인 차원에서 겪는 ‘학습된 무기력’에 대한 글을 썼는데, 페친 분께서 조직에도 마찬가지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주셨네요. 그래서 조직 차원에서 학습된 무기력에 대해 이야기를 약간만 해보겠습니다. (제대로 다루려면 저도 생각 정리가 여러모로 필요한 매우 복잡한 문제거든요. 휴일에 고생하고 싶지 않으니 여기서는 간단간단하게 ㅋ)
조직은 구멍가게 같은 스타트업이건 한 나라의 정부건 절대로 그 조직의 최고 책임자를 넘어서는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대표자가 자기 역량을 넘는 인력을 채용하지 않고, 자신의 사고를 뛰어넘는 아이디어를 용인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대부분의 조직에서 대표자가 ‘go / no go’ 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고의 ‘패턴’이 존재하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속은 이 ‘선호’가 이성적 판단보다 보통 우선합니다. ‘어떤 결정이 우리 사업에 유리하다’는 생각이 먼저 와서 그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저 아이디어가 맘에 드는 걸’ 이라고 생각해서 ‘그럼 저 결정이 우리에게 유리할거야’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정책을 지지해서 정치인을 뽑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을 지지하다보니 그의 정책이 옳은 것처럼 느낀다는 거죠.
기업체의 윗사람도 똑같습니다. 자기의 취향에 맞는 보고는 ‘옳고 효과적인 아이디어’라고 생각하고 자기 마음에 안드는 아이디어는 ‘틀리고 근거없는’ 아이디어라고 느끼는 것이죠. 당연히 이 선호, 그리고 그에 따른 결정은 일정한 패턴을 보입니다. 때문에 부하 직원들에게 ‘이런 종류의 아이디어는 통과되고 저런 종류의 아이디어는 무조건 까이고’ 라는 인식이 생겨납니다. 어느 순간부터 직원들은 굳이 통과도 안되고 욕만 먹을 아이디어나 의견을 제시하지 않게 됩니다. 욕먹고 까이는데 누가 나서겠어요. 이게 6개월, 1년이 되면 회사에서는 완연한 법칙이 생겨납니다. 조직에 가장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통과되고 욕먹지 않을, 좀 더 부정적으로는 윗사람 입맛에 맞는 아이디어만 보고가 올라갑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조직원들에게 무기력이 학습됩니다.
“야, 그런 거 보고해봐야 대표가 이해도 못하고 욕만 먹어. 뭐하러 준비하냐?’ 같은 말들이 자연스럽게 나오죠.
해결책을 알면서도 이를 논의, 실행하려는 것 자체를 사전에 포기해버리고, 어차피 안될 것이라 사전에 지레짐작하고, 이 부정적인 전망에 맞춰서 조직원들이 행동하고, 그래서 실제로 조직에서 해결책은 결코 실행될 수 없이 되는 것이 ‘조직적 무기력이 학습된
상태’입니다.
이 상태를 극복하는 방법은 결국 최상층 경영진의 자기 반성이고, 자기에게 불편한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회사에서는 맨날 위기를 강조하고, 혁신을 부르짖고, 신사업 아이디어를 백방으로 찾지만 잘 안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대표자들이 정작 자기는 위기감을 느껴서 스스로 바꿔보려고 하지 않고, 남들보고만 혁신하라고 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디어는 ‘야, 어디서 그런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있냐?’ 같은 태도를 유지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직원들은 이를 대단히 잘 ‘내면화’해서 철저하게 무기력해지는 걸로 자기를 보호합니다.
아이에게 심리적 문제가 있을 경우 부모 치료가 병행되는 것처럼 조직이 성장하려면 경영진의 자기 반성이 필요합니다. 아니면 조직의 내면화된 무기력을 깰 수 없습니다.
#이윤성
조직은 구멍가게 같은 스타트업이건 한 나라의 정부건 절대로 그 조직의 최고 책임자를 넘어서는 성과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대표자가 자기 역량을 넘는 인력을 채용하지 않고, 자신의 사고를 뛰어넘는 아이디어를 용인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는 대부분의 조직에서 대표자가 ‘go / no go’ 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고의 ‘패턴’이 존재하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속은 이 ‘선호’가 이성적 판단보다 보통 우선합니다. ‘어떤 결정이 우리 사업에 유리하다’는 생각이 먼저 와서 그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저 아이디어가 맘에 드는 걸’ 이라고 생각해서 ‘그럼 저 결정이 우리에게 유리할거야’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정책을 지지해서 정치인을 뽑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을 지지하다보니 그의 정책이 옳은 것처럼 느낀다는 거죠.
기업체의 윗사람도 똑같습니다. 자기의 취향에 맞는 보고는 ‘옳고 효과적인 아이디어’라고 생각하고 자기 마음에 안드는 아이디어는 ‘틀리고 근거없는’ 아이디어라고 느끼는 것이죠. 당연히 이 선호, 그리고 그에 따른 결정은 일정한 패턴을 보입니다. 때문에 부하 직원들에게 ‘이런 종류의 아이디어는 통과되고 저런 종류의 아이디어는 무조건 까이고’ 라는 인식이 생겨납니다. 어느 순간부터 직원들은 굳이 통과도 안되고 욕만 먹을 아이디어나 의견을 제시하지 않게 됩니다. 욕먹고 까이는데 누가 나서겠어요. 이게 6개월, 1년이 되면 회사에서는 완연한 법칙이 생겨납니다. 조직에 가장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통과되고 욕먹지 않을, 좀 더 부정적으로는 윗사람 입맛에 맞는 아이디어만 보고가 올라갑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조직원들에게 무기력이 학습됩니다.
“야, 그런 거 보고해봐야 대표가 이해도 못하고 욕만 먹어. 뭐하러 준비하냐?’ 같은 말들이 자연스럽게 나오죠.
해결책을 알면서도 이를 논의, 실행하려는 것 자체를 사전에 포기해버리고, 어차피 안될 것이라 사전에 지레짐작하고, 이 부정적인 전망에 맞춰서 조직원들이 행동하고, 그래서 실제로 조직에서 해결책은 결코 실행될 수 없이 되는 것이 ‘조직적 무기력이 학습된
상태’입니다.
이 상태를 극복하는 방법은 결국 최상층 경영진의 자기 반성이고, 자기에게 불편한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회사에서는 맨날 위기를 강조하고, 혁신을 부르짖고, 신사업 아이디어를 백방으로 찾지만 잘 안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대표자들이 정작 자기는 위기감을 느껴서 스스로 바꿔보려고 하지 않고, 남들보고만 혁신하라고 하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디어는 ‘야, 어디서 그런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있냐?’ 같은 태도를 유지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직원들은 이를 대단히 잘 ‘내면화’해서 철저하게 무기력해지는 걸로 자기를 보호합니다.
아이에게 심리적 문제가 있을 경우 부모 치료가 병행되는 것처럼 조직이 성장하려면 경영진의 자기 반성이 필요합니다. 아니면 조직의 내면화된 무기력을 깰 수 없습니다.
#이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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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스의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가>
1. 야구 선수의 타율을 생각해보자. 한 시즌 동안 매 경기에서 4타수 1안타(평균 타율 0.250)를 기록하면 평균쯤 되는 선수로 취급 받는다.
2. 그런데 이 선수가 매 경기 3타수 1안타(평균 타율 0.333)로 타율을 올리면 이 선수는 올스타 선수가 된다.
3. 그리고 이 선수가 이 타율을 선수 생활 내내 유지하면 그는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4. (하지만 수학적으로 따지고 보면) 이 셋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다. 선수의 위상이 달라지려면 12타수 당 1안타만 더 나오면 되기 때문이다. (타율 0.333(12타수 4안타)과 타율 0.250(12타수 3안타)는 12타수 기준으로 안타 1개 차이다)
5. (다만) 이렇게 꾸준한 개선을 이루어내려면 기술과 연습이 필요하다. 즉, 프로세스가 있어야 한다.
6. 다시 말해, 좀 더 넓은 선택지를 확보하고, 확증 편향을 피해야 하며, 중요한 준비를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
- 칩 히스 외, <후회 없음> 중
#SomewonYoon
1. 야구 선수의 타율을 생각해보자. 한 시즌 동안 매 경기에서 4타수 1안타(평균 타율 0.250)를 기록하면 평균쯤 되는 선수로 취급 받는다.
2. 그런데 이 선수가 매 경기 3타수 1안타(평균 타율 0.333)로 타율을 올리면 이 선수는 올스타 선수가 된다.
3. 그리고 이 선수가 이 타율을 선수 생활 내내 유지하면 그는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
4. (하지만 수학적으로 따지고 보면) 이 셋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다. 선수의 위상이 달라지려면 12타수 당 1안타만 더 나오면 되기 때문이다. (타율 0.333(12타수 4안타)과 타율 0.250(12타수 3안타)는 12타수 기준으로 안타 1개 차이다)
5. (다만) 이렇게 꾸준한 개선을 이루어내려면 기술과 연습이 필요하다. 즉, 프로세스가 있어야 한다.
6. 다시 말해, 좀 더 넓은 선택지를 확보하고, 확증 편향을 피해야 하며, 중요한 준비를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
- 칩 히스 외, <후회 없음> 중
#Somewon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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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등교
.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유니세프 전시회에 갔다가 벽면 가득 대형 프린트로 전시된 이 사진을 보고 너무 반가워 함박 웃음을 지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진작가인 김녕만 선생님의 작품 '강제등교'다.
. 전시에는 그저 사진 제목만 덜렁 붙어있었지만 이 사진에는 재밌는 뒷얘기도 있다. 전북 고창 출신인 김녕만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딱히 직업을 찾지 못한 '백수'였다. 그런데 1969년 고창군청에서 동네의 자랑거리인 고창읍성을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도대체 이 성이 언제 지어졌는지 아는 사람?'을 찾는 공모전을 열었다. 남는 건 시간뿐이었던 김녕만은 읍성을 샅샅이 뒤지면서 희미한 한자들을 찾았는데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빌린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 그 사진을 들고 서울 국립중앙도서관에 올라가 무작정 고서의 기록들 중에 비슷한 글자가 있는지 뒤지는 식으로 찾아서 단종 원년인 1453년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 이 일로 사진의 힘(?)을 알게 된 김녕만은 받은 상금을 몽땅 들고 서울로 올라가 사진학원에서 6개월 단기속성으로 사진을 배운다. 그리고 다시 이듬해 고창군청 공보실에 사진담당으로 취직한다. 이쯤되면 두 개의 팔이 서로를 그리고 있는 에셔의 그림이 연상될 정도의 자기 순환이 아닌가.
. 이 순환고리를 끊은 것은 그 자신이었다. 사진에 대한 열망이 크다는 것을 알게된 그는 어렵게 구한 군청공무원 자리를 내놓고 당시로서는-지금 기준으로도- 매우 늦은 스물 넷의 나이에 서라벌 예술대학 사진과에 입학한다. 당시 사진기는 비싼 물건이라 군청 사진기를 반납하고 나왔으니 명색이 경력 사진가지만 카메라 하나도 없고 심지어 월급이 끊겼으니 숙식과 등록금을 해결할 길도 없이 오로지 그간 모은 돈으로 입학금만 간신히 내고 무작정 상경한 것이었다.
. 그의 꿈은 신문사진기자, 그것도 콕 집어서 동아일보 사진기자였다. 이유도 단순했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동아일보 신문지국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한 지 겨우 2년 째였던 1974년 동아일보사에서 여는 '동아사진콘테스트'에 사진을 내보기로 한다. 이 콘테스트는 당시 정부 주관의 '국전'과 쌍벽을 이루는, 사진가들에게는 최고의 경연장이었다. 하지만 김녕만은 고창에서도 주로 동네 사람들, 시골 마을의 모습들을 기록하는 사진을 찍었고 그 자신은 지금도 고학을 하느라 아침 저녁으로 산동네를 걸어 오르내리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뭔가 대단히 예술적이고 거창한 사진을 찍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매일 보는 주변의 모습을 담아 출품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그가 처음으로 제출한 사진이 바로 이 '강제 등교'다.
. 겨우 대학 2학년, 완전 초짜의 사진이었지만 이 사진에 담긴 따뜻하고 진솔한 시선이 인정되었는지 그는 이 첫 사진으로 곧장 입상하여 '등단'하게 되었다. 입상자들은 동아일보 사진동우회의 회원자격을 얻게 되는데 김녕만은 이것이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77, 78년 연달아 사진동우회원전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결국 78년 최우수상 시상식장에서 동아일보에 특채된다. 그러니까 이 사진 '강제등교'는 사진작가 김녕만이 탄생하도록 만들어준 '출세작'인 셈.
. 다시 사진으로 돌아와보자. 아이의 등에 멘 가방이 빤딱빤딱한 걸로 보아 가방을 산지 얼마 안된 국민학교 신입생인 모양이다.(쓰리세븐 가방이 아닐까? 가방 앞 그림은 마징가제트?) 새 옷, 새 바지, 새 신발까지 학교 간다고 아주 집에서 큰맘먹고 세트로 뽑아준 모양새다.(이때는 왜 애들까지 저렇게 아저씨 잠바를 입혔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목까지 지퍼를 잔뜩 끌어올려서.. ) 잠바 오른쪽에는 리본까지 달린 신입생 이름표가 팔랑거리고 있다.
. 하지만 그건 부모님 마음이고, 골목에서 맨날 구슬치기, 딱지치기 하고 놀던 애가 갑자기 학교에 가서 책상에 붙잡혀 앉아 하루 종일 공부를 하라고 하니 당연히 가기 싫지. 안간다고 우왱우왱 거리는 아이가 실내화가 담긴 신발주머니까지 내팽개치고 버티자 엄마는 본인 손에 신발주머니를 챙겨들고, 아이가 손을 빼지 못하도록 손목을 고리잡고 끌고가는 중이다. 동생을 포대기에 들쳐업고 쓰레빠가 아닌 구두까지 챙겨신은 모양이 이대로 학교까지 아이를 끌고 갈 기세다. '시려~ 안가~ 안가끄야!~'를 외치는 아이의 빠진 앞니가 훤히 보이는 가운데
. 이 사진의 압권은 인물들 중 유일하게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포대기의 둘째 표정이다. 나 저 마음 뭔지 안다. 나도 둘째거든. 형의 재앙이 커질수록 나는 거기서 한발 물러나 있다는 것이 가일층 행복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거기서 즐겁게 웃으면 한데 묶여서 야단맞는다는 눈치도 챙길만한 나이. 그저 '저는, 이 사태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평화를 원해요. 어.. 사진기가 니콘인가요?'하는 표정으로 딴청부리며 따뜻하고 편안한 어머니의 등에 찰싹 붙어있다.
. 하지만 잘 보면 쟤도 포대기 신세질 나이는 조금 지나보인다. 학교 안간다고 강짜부리는 큰애를 끌고 가려니 둘째를 집에 혼자 둘수도 없고 그렇다고 빨리 걷지도 못하는 애까지 양손에 붙들고 가려니 등교시간을 맞출 수 없을 것 같아 한놈은 등에 묶고 한놈은 손목을 묶어 '하드캐리' 하시는 중.
. 저런 어머니들의 '강제 등교'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문득 집이 어려우니 공고에 가겠다는 나의 말에 밥상을 뒤엎었던 우리 어머니가 생각나고.. 오히려 우리집은 형은 한없이 착한 모범생이었고 사고뭉치인 내가 저렇게 어머니 손에 손목을 붙잡혀 무던히도 끌려다녔었는데...
. 이따가 어머니께 전화라도 한번 드려봐야겠다.
* 김녕만 작가 관련 내용 일부는 열화당 사진문고의 '김녕만'을 참고했습니다.
#KwakHanyoung
.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유니세프 전시회에 갔다가 벽면 가득 대형 프린트로 전시된 이 사진을 보고 너무 반가워 함박 웃음을 지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진작가인 김녕만 선생님의 작품 '강제등교'다.
. 전시에는 그저 사진 제목만 덜렁 붙어있었지만 이 사진에는 재밌는 뒷얘기도 있다. 전북 고창 출신인 김녕만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딱히 직업을 찾지 못한 '백수'였다. 그런데 1969년 고창군청에서 동네의 자랑거리인 고창읍성을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도대체 이 성이 언제 지어졌는지 아는 사람?'을 찾는 공모전을 열었다. 남는 건 시간뿐이었던 김녕만은 읍성을 샅샅이 뒤지면서 희미한 한자들을 찾았는데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빌린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 그 사진을 들고 서울 국립중앙도서관에 올라가 무작정 고서의 기록들 중에 비슷한 글자가 있는지 뒤지는 식으로 찾아서 단종 원년인 1453년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 이 일로 사진의 힘(?)을 알게 된 김녕만은 받은 상금을 몽땅 들고 서울로 올라가 사진학원에서 6개월 단기속성으로 사진을 배운다. 그리고 다시 이듬해 고창군청 공보실에 사진담당으로 취직한다. 이쯤되면 두 개의 팔이 서로를 그리고 있는 에셔의 그림이 연상될 정도의 자기 순환이 아닌가.
. 이 순환고리를 끊은 것은 그 자신이었다. 사진에 대한 열망이 크다는 것을 알게된 그는 어렵게 구한 군청공무원 자리를 내놓고 당시로서는-지금 기준으로도- 매우 늦은 스물 넷의 나이에 서라벌 예술대학 사진과에 입학한다. 당시 사진기는 비싼 물건이라 군청 사진기를 반납하고 나왔으니 명색이 경력 사진가지만 카메라 하나도 없고 심지어 월급이 끊겼으니 숙식과 등록금을 해결할 길도 없이 오로지 그간 모은 돈으로 입학금만 간신히 내고 무작정 상경한 것이었다.
. 그의 꿈은 신문사진기자, 그것도 콕 집어서 동아일보 사진기자였다. 이유도 단순했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동아일보 신문지국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학에 입학한 지 겨우 2년 째였던 1974년 동아일보사에서 여는 '동아사진콘테스트'에 사진을 내보기로 한다. 이 콘테스트는 당시 정부 주관의 '국전'과 쌍벽을 이루는, 사진가들에게는 최고의 경연장이었다. 하지만 김녕만은 고창에서도 주로 동네 사람들, 시골 마을의 모습들을 기록하는 사진을 찍었고 그 자신은 지금도 고학을 하느라 아침 저녁으로 산동네를 걸어 오르내리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뭔가 대단히 예술적이고 거창한 사진을 찍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매일 보는 주변의 모습을 담아 출품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그가 처음으로 제출한 사진이 바로 이 '강제 등교'다.
. 겨우 대학 2학년, 완전 초짜의 사진이었지만 이 사진에 담긴 따뜻하고 진솔한 시선이 인정되었는지 그는 이 첫 사진으로 곧장 입상하여 '등단'하게 되었다. 입상자들은 동아일보 사진동우회의 회원자격을 얻게 되는데 김녕만은 이것이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77, 78년 연달아 사진동우회원전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결국 78년 최우수상 시상식장에서 동아일보에 특채된다. 그러니까 이 사진 '강제등교'는 사진작가 김녕만이 탄생하도록 만들어준 '출세작'인 셈.
. 다시 사진으로 돌아와보자. 아이의 등에 멘 가방이 빤딱빤딱한 걸로 보아 가방을 산지 얼마 안된 국민학교 신입생인 모양이다.(쓰리세븐 가방이 아닐까? 가방 앞 그림은 마징가제트?) 새 옷, 새 바지, 새 신발까지 학교 간다고 아주 집에서 큰맘먹고 세트로 뽑아준 모양새다.(이때는 왜 애들까지 저렇게 아저씨 잠바를 입혔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목까지 지퍼를 잔뜩 끌어올려서.. ) 잠바 오른쪽에는 리본까지 달린 신입생 이름표가 팔랑거리고 있다.
. 하지만 그건 부모님 마음이고, 골목에서 맨날 구슬치기, 딱지치기 하고 놀던 애가 갑자기 학교에 가서 책상에 붙잡혀 앉아 하루 종일 공부를 하라고 하니 당연히 가기 싫지. 안간다고 우왱우왱 거리는 아이가 실내화가 담긴 신발주머니까지 내팽개치고 버티자 엄마는 본인 손에 신발주머니를 챙겨들고, 아이가 손을 빼지 못하도록 손목을 고리잡고 끌고가는 중이다. 동생을 포대기에 들쳐업고 쓰레빠가 아닌 구두까지 챙겨신은 모양이 이대로 학교까지 아이를 끌고 갈 기세다. '시려~ 안가~ 안가끄야!~'를 외치는 아이의 빠진 앞니가 훤히 보이는 가운데
. 이 사진의 압권은 인물들 중 유일하게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포대기의 둘째 표정이다. 나 저 마음 뭔지 안다. 나도 둘째거든. 형의 재앙이 커질수록 나는 거기서 한발 물러나 있다는 것이 가일층 행복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거기서 즐겁게 웃으면 한데 묶여서 야단맞는다는 눈치도 챙길만한 나이. 그저 '저는, 이 사태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평화를 원해요. 어.. 사진기가 니콘인가요?'하는 표정으로 딴청부리며 따뜻하고 편안한 어머니의 등에 찰싹 붙어있다.
. 하지만 잘 보면 쟤도 포대기 신세질 나이는 조금 지나보인다. 학교 안간다고 강짜부리는 큰애를 끌고 가려니 둘째를 집에 혼자 둘수도 없고 그렇다고 빨리 걷지도 못하는 애까지 양손에 붙들고 가려니 등교시간을 맞출 수 없을 것 같아 한놈은 등에 묶고 한놈은 손목을 묶어 '하드캐리' 하시는 중.
. 저런 어머니들의 '강제 등교'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문득 집이 어려우니 공고에 가겠다는 나의 말에 밥상을 뒤엎었던 우리 어머니가 생각나고.. 오히려 우리집은 형은 한없이 착한 모범생이었고 사고뭉치인 내가 저렇게 어머니 손에 손목을 붙잡혀 무던히도 끌려다녔었는데...
. 이따가 어머니께 전화라도 한번 드려봐야겠다.
* 김녕만 작가 관련 내용 일부는 열화당 사진문고의 '김녕만'을 참고했습니다.
#KwakHan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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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를 시작하면 실무적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을 대단히 많이 합니다. 중요하죠. 자기 분야에 대해 빠삭하게 잘 안다는 것은 초기 커리어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갖습니다. 이를 통해 완전한 specialist로 성장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사실 장기간에 걸쳐 커리어를 이끌어가는 힘은 소프트 스킬이 훨씬 강력합니다. 바다의 파도가 눈에 띄지만 사실 강력한 힘은 거대한 해류인 것과 같습니다.
소프트 스킬의 상당 부분은 타고 나거나 가정 교육으로 무의식중에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성인 이후 노력한다고 해도 쉽게 체화가 되지 않습니다만, 꽤 단기간내에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고, 일단 일정 수준 이상 되면 여러모로 쓸모 있는 기술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설득력 커뮤니케이션이죠. 설명적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설득적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똑같이 성실하다는 전제하에 사회 생활 초기에는 실무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 앞서가지만, 뒤로 갈수록 설득을 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해집니다. 40대가 넘어가면 아예 업무의 반 이상이 설득이고 조율입니다. 창업을 하시면 거의 대부분의 업무가 설득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설득적 커뮤니케이션은 배울 수 있습니다.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10년, 뭐 이런 식으로 걸리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건 이를 의식하고 노력하려는 것이죠.
창업자들을 만나면 '최소한의 설득력을 갖추기 전에는 사업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상당히 많습니다. 말 잘 못하는 엔지니어들만 그런게 아니라 자기는 말 잘한다고 믿는 마케팅이나 기획 분야 출신들이 더 못합니다. 우리나라의 언어 특성이나 교육 특성상 우리 대부분은 설득에 매우 취약해요.
#이복연
하지만 사실 장기간에 걸쳐 커리어를 이끌어가는 힘은 소프트 스킬이 훨씬 강력합니다. 바다의 파도가 눈에 띄지만 사실 강력한 힘은 거대한 해류인 것과 같습니다.
소프트 스킬의 상당 부분은 타고 나거나 가정 교육으로 무의식중에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성인 이후 노력한다고 해도 쉽게 체화가 되지 않습니다만, 꽤 단기간내에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고, 일단 일정 수준 이상 되면 여러모로 쓸모 있는 기술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설득력 커뮤니케이션이죠. 설명적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설득적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똑같이 성실하다는 전제하에 사회 생활 초기에는 실무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 앞서가지만, 뒤로 갈수록 설득을 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해집니다. 40대가 넘어가면 아예 업무의 반 이상이 설득이고 조율입니다. 창업을 하시면 거의 대부분의 업무가 설득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설득적 커뮤니케이션은 배울 수 있습니다.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10년, 뭐 이런 식으로 걸리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건 이를 의식하고 노력하려는 것이죠.
창업자들을 만나면 '최소한의 설득력을 갖추기 전에는 사업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상당히 많습니다. 말 잘 못하는 엔지니어들만 그런게 아니라 자기는 말 잘한다고 믿는 마케팅이나 기획 분야 출신들이 더 못합니다. 우리나라의 언어 특성이나 교육 특성상 우리 대부분은 설득에 매우 취약해요.
#이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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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가 진짜 무섭게 빠지면..
누구도 주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음. 아니 할 생각을 못함. 심지어 주식투자를 업으로 하는 이들 조차도. 모이면 그 중 가장 보수적으로 싸게 산 이들 마저도 개별주식 기준으로 -50%를 넘나드는 상황이니. 주식이 없는 이들은 분위기 때문에 말을 못 꺼내고. 그리고 어차피 사봐야 뭐든 다 물려버리는 게 기정사실 같으니까. 시장에 압도되어 버리는 것.
이게 2008년 10월 이후의 상황이었음. 그 시절의 분위기가 과연 다시 올까 싶었는데.. 왠지 다가오는 느낌이 든다.
나도 매크로 이슈들을 지켜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누구도 지속적으로 그걸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음. 지금껏 그러는 걸 본 적이 없다.(나만 못봤을 수 있음. 태클금지) 올해 역대급 인플레 상황도 사실 러우전쟁과 같은 돌발변수들도 많이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어 보이고.. 시장에 찬물을 확 끼얹은 지난달 cpi 발표 이전까지 누구도 유가 내려가더라도 주거비 때문에 내려가기 어려울 거라고 예측한 사람은 없었음. 지금에서야 다들 애초부터 그렇게 예측해온 것처럼 말들 하고 있지만. 이제는 구조적인 불가피성을 피력하는데, 이는 전형적인 패턴. 물론 그게 틀릴 거라는 말은 아님.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를거라는 이야기.
내가 알 수 있는 사이클에만 투자하려 하고, 그 원칙을 지키고자 함은 변함이 없음.
모운용사 고객레터를 보니.. 시장에 오래 있었던 이들은 다들 생각이 비슷한 것 같다는 느낌. 길게 보면 무조건 수익나는 장인데, 당장 6개월~max 1년은 앞이 잘 안보이고. 주가가 선반영 중이라 바닥이 거의 다 온 것 같긴 한데, 단기적으로는 더 내려갈 수 있어보이는 것도 사실이고. 깊이 공감.
누구도 주식을 언급하지 않다가도, 간혹 누군가가 허탈한 마음에.. "xxx는 올해 이익 반토막 나도 멀티플 바닥이더라구요." 하소연하면 다른 누군가가 흘끔 쳐다보더니.
"그렇긴 하네."
그게 2009년 2월 분위기였던 걸로 기억.
그게 반등장의 시작이었던 걸로 기억.
p.s. 올라갈 거라는 희망 갖자는 게 아니라, 그냥 항상 정신을 차리자는 말. 어떤 상황에서도.
#EunwonLee
누구도 주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음. 아니 할 생각을 못함. 심지어 주식투자를 업으로 하는 이들 조차도. 모이면 그 중 가장 보수적으로 싸게 산 이들 마저도 개별주식 기준으로 -50%를 넘나드는 상황이니. 주식이 없는 이들은 분위기 때문에 말을 못 꺼내고. 그리고 어차피 사봐야 뭐든 다 물려버리는 게 기정사실 같으니까. 시장에 압도되어 버리는 것.
이게 2008년 10월 이후의 상황이었음. 그 시절의 분위기가 과연 다시 올까 싶었는데.. 왠지 다가오는 느낌이 든다.
나도 매크로 이슈들을 지켜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누구도 지속적으로 그걸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음. 지금껏 그러는 걸 본 적이 없다.(나만 못봤을 수 있음. 태클금지) 올해 역대급 인플레 상황도 사실 러우전쟁과 같은 돌발변수들도 많이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어 보이고.. 시장에 찬물을 확 끼얹은 지난달 cpi 발표 이전까지 누구도 유가 내려가더라도 주거비 때문에 내려가기 어려울 거라고 예측한 사람은 없었음. 지금에서야 다들 애초부터 그렇게 예측해온 것처럼 말들 하고 있지만. 이제는 구조적인 불가피성을 피력하는데, 이는 전형적인 패턴. 물론 그게 틀릴 거라는 말은 아님.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를거라는 이야기.
내가 알 수 있는 사이클에만 투자하려 하고, 그 원칙을 지키고자 함은 변함이 없음.
모운용사 고객레터를 보니.. 시장에 오래 있었던 이들은 다들 생각이 비슷한 것 같다는 느낌. 길게 보면 무조건 수익나는 장인데, 당장 6개월~max 1년은 앞이 잘 안보이고. 주가가 선반영 중이라 바닥이 거의 다 온 것 같긴 한데, 단기적으로는 더 내려갈 수 있어보이는 것도 사실이고. 깊이 공감.
누구도 주식을 언급하지 않다가도, 간혹 누군가가 허탈한 마음에.. "xxx는 올해 이익 반토막 나도 멀티플 바닥이더라구요." 하소연하면 다른 누군가가 흘끔 쳐다보더니.
"그렇긴 하네."
그게 2009년 2월 분위기였던 걸로 기억.
그게 반등장의 시작이었던 걸로 기억.
p.s. 올라갈 거라는 희망 갖자는 게 아니라, 그냥 항상 정신을 차리자는 말. 어떤 상황에서도.
#Eunwon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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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트업을 경영하며 실감한 피터 드러커의 7가지 지혜
피터드러커는 경영을 고객과 구성원의 관점으로 재구성한 특별한 사람입니다.
'경영이 그렇게 중요하다는데 그게 뭐죠?' 라는 질문에 가장 간결하게 대답하는 그는 초보 리더들에게는 나침반을, 숙련된 리더에게는 지향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불확실성이 가득할때 피터드러커가 세운 원칙을 보면 얼마나 본질이 중요한지 다시 깨닫게 되는데요, 이번 아웃스탠딩 기고에서는 드러커가 남긴 아티클 중 하나를 바탕으로 설명과 사례를 덧붙여 보았습니다.
1. 경영은 인간에 관한 것이다.
2. 경영은 사람들의 통합을 다루기 때문에 문화가 깊은 배경이 된다.
3. 모든 기업에는 단순하고 명확한 단일 목표가 있어야 한다.
4. 변화하는 시장 니즈와 기회에 따라 기업과 구성원이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게 해야한다.
5. 기업은 개인의 책임, 그리고 의사소통을 바탕으로 운영돼야 한다.
6. 생산량이나 이익은 경영 및 사업 성과를 측정하는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7. 가장 중요한 사실은 조직의 어떤 결과도 내부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문 Management and the World’s Work, HBR 1988)
#손종수
피터드러커는 경영을 고객과 구성원의 관점으로 재구성한 특별한 사람입니다.
'경영이 그렇게 중요하다는데 그게 뭐죠?' 라는 질문에 가장 간결하게 대답하는 그는 초보 리더들에게는 나침반을, 숙련된 리더에게는 지향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불확실성이 가득할때 피터드러커가 세운 원칙을 보면 얼마나 본질이 중요한지 다시 깨닫게 되는데요, 이번 아웃스탠딩 기고에서는 드러커가 남긴 아티클 중 하나를 바탕으로 설명과 사례를 덧붙여 보았습니다.
1. 경영은 인간에 관한 것이다.
2. 경영은 사람들의 통합을 다루기 때문에 문화가 깊은 배경이 된다.
3. 모든 기업에는 단순하고 명확한 단일 목표가 있어야 한다.
4. 변화하는 시장 니즈와 기회에 따라 기업과 구성원이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게 해야한다.
5. 기업은 개인의 책임, 그리고 의사소통을 바탕으로 운영돼야 한다.
6. 생산량이나 이익은 경영 및 사업 성과를 측정하는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7. 가장 중요한 사실은 조직의 어떤 결과도 내부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원문 Management and the World’s Work, HBR 1988)
#손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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